유엔저널 이미형 기자 | 성북구립미술관은 2024년 첫 기획 전시로 한국 현대 추상조각 대표 작가인 최만린(1935~2020)의 석고 원형조각을 중심으로 한 '흰: 원형'展을 오는 11월 2일(토)까지 성북구립 최만린미술관에서 개최한다.
이번 '흰: 원형'展은 최만린의 석고 원형 조각만 선보이는 최초의 전시로, 1958년부터 마지막 시기인 2010년대까지 60여 년이 넘는 최만린의 조각사를 대표하는 석고 원형 54점과 드로잉 11점 등 총 65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특히 작가가 30년간(1988~2018) 삶의 터전이자 작업실로 삼았던 '성북구립 최만린미술관'은 80년대 후반 이후의 석고 원형 대부분이 탄생한 곳으로, 본 전시는 '근원적 장소로의 회귀'라는 뜻깊은 의미를 지닌다.
1935년생인 최만린은 한국 현대조각 1세대 작가다. 그는 1950년대 말 전후(戰後)의 폐허 속에서도 생명의 근원에 대한 탐구를 거듭한 '이브' 연작을 시작으로 조각가의 길을 걸어갔다. 이후 서예의 필법과 동양철학이 모티브가 된 1960년대 '천(天)', '지(地)', '현(玄)', 1970년대 '일월(日月)', '천지(天地)', 그리고 생명의 보편적 의미와 형태를 탐구하는 '태(胎)', 1990년대부터 말년까지 제작된 '0' 등 추상 작업으로 일관해 온 그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조형언어를 구축해 냈을 뿐만 아니라 한국 현대추상조각사에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최만린의 석고 조각은 대부분 흙으로 빚은 형태를 바탕으로 제작된 석고 원형에 해당한다. 작가의 초기작인 1950~1960년대 인체상들(현재 대부분 유실됨)과 '이브' 중 일부는 당시 학생이었던 작가가 비싼 브론즈로 제작할 여력이 없었던 탓에 석고 원형으로만 제작돼 그 자체가 유일작으로 남겨지기도 했다. 60년대 초에 들어서며 테라코타, 시멘트 등의 재료를 사용하던 작가는 1970년대를 기점으로 청동 주물을 위한 석고 원형을 본격적으로 제작하기 시작했으며, 이 과정은 말년의 작업까지 지속됐다. 특히 흙을 빚어 만든 최초의 형태는 석고형을 뜨는 과정을 통해 대부분 파괴되는 까닭에 결국 석고로 뜬 형태가 본래의 형태를 지닌 '원형'으로서 존재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석고 원형은 주물을 위한 형상의 틀로 간주되거나 완성된 청동 조각의 유일성을 위해 청동 주물 제작 직후 폐기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최만린은 흙의 형태를 빌어 탄생한 석고 원형 또한 작가의 직접적인 손길과 노동을 통해 보다 완벽한 형상으로 다듬어지는 조각 자체로 바라봤다. 깨지기 쉬운 석고의 특성상 보관이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1950년대에 제작된 석고 작품부터 말년인 2010년대에 제작한 작품들까지 오랜 기간 수백 점의 석고 원형들을 자신의 수장고와 작업실에서 보관해왔다.
석고 원형은 본디 가장 순수한 흰색을 지닌 채 세상에 태어난다. 본 전시에 출품된 석고 원형 중 주물을 뜨지 않은 채 남겨진 석고 원형은 작가 사후 그 자체가 유일작이 돼버린 석고 조각이기에 여전히 흰 빛깔을 뿜어낸다. 그러나 청동 주물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흑연이나 모래, 뜨거운 청동의 열을 직접 품은 석고 원형의 표면에는 마치 저마다의 생과 사를 지닌 우주의 행성들처럼 그 탄생의 시간과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으며, 그 과정을 따라 황토색이나 검은색, 푸른색 등의 빛깔이 덧입혀지기도 한다.
이처럼 이번 '흰: 원형' 전시에서는 최만린의 흰 석고 원형뿐만 아니라 다채로운 빛깔과 각각의 시간을 지닌 석고 원형들이 한 공간에서 펼쳐진다. 전시를 찾은 관람객들은 조각 탄생의 순간과 흔적들, 그리고 조각가의 손길이 고스란히 새겨진 석고 원형 조각을 직접 마주함으로써 조각의 이면에 깃든 작가의 예술 세계를 또 다른 시각으로 경험하고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